1. 학창 시절, 리더십의 싹이
간절히 바라고 원하면 이루어진다고 했다. 3년의 긴 시간 속에 유난히도 밝은 밤하늘의 북극성을 보며 나 자신에게 묻곤 하였다. 다시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갈 수 있을까? 어느덧 그 작은 꿈이 실현이 되어서 서울에 있는 대학에 와 있지 않은가? 고교 생활동안 철저히 통제되었던 생활에서 캠퍼스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던 대학 생활이 너무도 좋았다. 춘 삼월의 꽃향기와 풋풋한 신출내기가 수업시간을 맘대로 선택할 수 있고, 좋아하는 친구들과 어울려 동아리 활동을 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신나게 젊음의 낭만을 만끽할 수 있었던 때였다.
동기생 중에서 회장선출을 하는 날이었다. 어디든지 대표를 선발할 때 순서가 있다. 우리 동아리를 위해서 봉사를 해 보겠다고 생각하는 사람 손들어라! 동기 중에서 늦게 동아리에 가입한 나는 눈치도 없이 손을 번쩍 들었다. 휘둥그레진 동기들과 선배들! 그렇게 도전은 시작되었다.
80년대 초반, 나라가 온통 민주화운동으로 시끄럽던 시국에 대학 서클은 학생 운동의 아지트였다. AFKN 청취회, ALA라는 연합 동아리로 여러 학교가 모여서 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 당시 국내 언론은 철저히 통제를 받고 있던 터라 미국의 한국주둔 부대에서 송출되는 AFKN뉴스를 듣는 것은 중앙정보부, 경찰의 감시 대상이었다. 알다시피 86년 6・29 시국 선언이 있기 전에는 교내 학생처에는 경찰, 일명 짭새가 늘 상주해 있어 학교의 동향과 동태를 파악하던 시기였다.
돌이켜 보면 참 재미있던 시절이었다. 서클 회장은 학생운동에 참가해야 하는 위치이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속한 서클은 데모를 위해서 교문과 도서관으로 가는 것보다는 기타 치며 놀고, 저녁에는 함께 모여서 AFKN 청취를 열심히 하는 분위기였다.
물론 개인의 성향에 따라서는 필수과목이었던 군사훈련과목인 교련의 마지막 수업출석을 거부하고 최루탄 연기를 열심히 마시다가 강제징집을 당해서 다른 동기들보다 먼저 전방군대에 끌러간 친구들도 있었다.
나는 그 당시 정신없는 가운데에도 어렸을 때부터 꿈에 그리던 장교가 되어보겠다는 생각으로 장교 후보생 ROTC 모집에 지원했다. 물론, 4년 학비 걱정이 있었지만, 부모님께는 학비를 지원해 주시면 장교월급이 있으니까, 제대해서 다 갚겠다는 약속을 하고 지원을 받았다. 학업을 하면서 병행한 엄격한 장교후보생 교육은 내 삶의 훌륭한 토양이 되기도 하였다. 물론, 제대하면서 학비도 부모님께 모두 갚아드렸다.
2. 적은 가능성의 기회
때마다 주저함 없이 손을 잘 들어서 적은 가능성의 기회를 잡았던 것을 가만히 생각해 보니, 초등학교 시절 5학년 학급반장 선거 당시 용기를 내서 손을 번쩍 들었던 것을 시작으로, 대학 1학년 과대표 선발까지, 지금도 잠시 주저하지만 하고 싶은 때 손들고 도전하는 용기는 참 오래된 습관이기도 하다. ROTC 2년을 마치기 전에 미리 대기업에 취업해 놓고 장교입대를 하는 제도가 삼성그룹에 있었다.
전자공학과 같은 학과에 동기 3명이 ROTC 후보생으로 있었다. 그런데 하필 3명이 모두 삼성에 입사지원서를 낸 것이다. 물론, 그 당시 서클 활동하랴, ROTC 군사훈련받으랴! 참 공부를 많이도 안 했지만, 기본성적을 받아놓기는 했었다. 당연히 같은 과에서는 학점이 가장 낮은 내가 낙방하리라 예상을 했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당당히 내가 합격을 한 것이다. 이것도 반전이다. 물론, 영어점수는 중고등학교 때부터, ALA 서클을 통해서 준비가 되어 있었다. 삼성의 입사시험 중에서 특히 중요한 것이 면접이라는 것은 익히 잘 알고 있었다. 면접관 앞에서 면접조장을 선발할 때 또 손을 번쩍 들었다. 면접 주제를 가지고 정해진 시간 안에 우리 면접그룹이 모두 하고 싶은 얘기를 다 했다. 한 명만 미역국을 먹고 모두 합격을 했다. 때마다 발동되는 작은 용기가 기회도 잡은 것이다.
그것은 리더십에 대한 작은 도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