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그건 사랑의 매! 약이 되었다

ideas6404 2025. 2. 27. 22:31

사랑의 개구리 가족 사진

 

1. 사랑의 매가 약이 될 수도 있다

 

학창 시절에는 꼭 칭찬과 격려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필요하면 정신을 차리게 하는 충격 요법도 필요하다. 지금은 학교 폭력, 군대 폭력으로 터부시 되고 있지만, 올바른 진로지도를 위해 사랑의 매가 약이 되는 경우도 있다. 고교시절 해운대 장산에 위치한 학교가 5만 평 부지로 정말 컸었다. 1학년 2학기가 되면 전공과를 배치받게 되는데, 내가 선택한 전기과로 60명이 배치되어 공부를 했다. 그 당시 30대 중반의 무섭다고 소문난 대머리 노총각 선생님께서 앞으로 2년 반 동안 담임으로 부임을 하게 되셨다. 우리 학과 친구들은 죽었다고 복창을 했다. 역시나 문제를 일으키거나 사고를 치는 날에는 눈에서 불꽃이 튀게 혼 줄을 내시는 모습을 여러 번 목격을 하곤 했다. 때론 단체로 엉덩이를 맞기도 했다. 담임선생님께서는 80년대 프로야구가 시작되었을 때, 대구 삼성 라이온즈의 이만수, 장효조 선수의 광팬이었던 모양이었다. 주말만 되면, 대구 야구장에 가셨다. 그래서인지 그 왼쪽 야구 폼으로 영락없이 단체로 엉덩이를 맞으려 하면, 무섭기도 하고 웃음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나는 고등학교 2학년 초반부터 허리에 디스크 증상이 있어서 정말 고생을 많이 했다. 그래서 방학 때가 되면, 동네에 있는 침을 잘 놓기로 유명한 할아버지께 대침으로 여러 번 침을 맞기도 했고, 경주에 금침으로 유명한 한의원도 찾아갔었다.

2.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사랑의 매

객지 생활에서 몸이 아프다 보니, 집 생각도 나고 더 이상 학교를 다닐 수 없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여러 날 고민하다가 그 무섭다는 담임선생님께 찾아가서 허리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아파 휴학을 했으면 한다는 말씀을 드렸다. 그런데 조용히 실습실에 가서 PVC파이프 지름 50mm, 길이 1.5m짜리를 만들어 오라고 했다. 그걸 가지고 허리가 아픈 학생에게 엉덩이 매를 칠 거라는 생각은 상상도 못 했다. 설마 했던 일이 벌어졌다! 엎드려뻗쳐 한 자세에서 그 유명한 왼쪽 야구 폼으로 20대를 맞았다. 그런데 생각보다 세게는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휴학이 얘들 장난이야! 그냥 학교 다녀! 돌아가!’라는 말을 듣고 더 이상 아무 말도 못 하고 사무실 문을 나오고 말았다. 어린 맘에 얼마나 서럽고 어이가 없었던지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줄줄 나왔다. 결국은 어디에 하소연도 못 하고 꼼짝없이 3학년을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일도 있었다. 나는 전기 실습과목을 잘못했고, 싫어했다. 그때는 학력고사 성적과 3학년 1학기 성적으로 동일계 전형으로 대학과 사관학교도 갈 수 있었다. 그래서 실습 성적 평가를 맡고 계신 담임선생님께 큰마음먹고 양주를 준비해서 찾아가기로 했다. 집에서 어렵게 공수해 온 죠니워커 블랙 양주가 순간 아깝게 생각되어 슈퍼에서 좀 비싼 와인으로 바꿔서 선생님 댁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런데 담임께서 안 계셔서 선생님의 모친이신 할머니께 말씀을 드리고 나왔다. 물론, 실습성적이 잘 나오긴 했다.

지금도 그때 담임께서 휴학을 허락하셨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한참 지나서 생각해 보니, 그건 사랑의 매였다. 그걸 깨닫게 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3. 정신이 번쩍 나는 Animal Training

ROTC 후보생 때, 한 달 동안 AT(Army Training)라고 다른 말로 Animal Training이라고 하는 교육을 받았다. 일반학생을 장교 후보생으로 단기간 변화를 시키려면 물리적으로 충격적인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즉, 일반 병사의 신병교육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선배들에게 필요악이니 참고 견디라는 정신교육을 받았다. 그래야만 군기가 바짝 들어간 후보생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정말 신기하게 그 훈련을 받고 난 뒤부터는 같은 교정인데도 그동안 왔다 갔다 했던 그 교정이 아니었다. 주위사람은 하나도 눈에 안 들어오고 오직 선배와 훈육관의 모습만 보였다. 그리고 조금씩 몸에 자세가 잡혀서 1년이 지나니 제법 장교 후보생의 자세도 나왔다. 5만 촉광의 소위 계급장을 어깨에 다는 임관을 하고 나서는 얼마나 가슴이 뿌듯하고 벅차올랐는지 모른다.

그때 더 이상 나빠질 게 없고, 희망이 없어 보이는 상황이지만, 참고 견디면, 군대용어로 악으로 깡으로 버티고 나면, 미처 경험해보지 못하는 희열과 감동의 순간이 반드시 온다는 믿음이 생겼다. 지금 이 순간이 어렵고 참기 힘든가!

 

시험과 고난, 이 또한 지나가리라! 더욱 값지고 찬란한 내일이 분명 있다.